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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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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명

생연동

생골(生骨)과 연동(淵洞)의 이름을 따서 생연리라 하였다. 동두천읍 당시 생연리는 7개리로 되어 있었으나 동두천시로 승격되면서 생연동은 4개 동이 되었다. 생연6리 생골부락은 시승격과 함께 내행동에 속한 바, 한일합방 당시이 부락의 돌틈에서 생골이 나왔다고 해서 '생골부락'으로 불리게 되었다.

  • 방축동(防築洞)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부터 방축이 있어 '방축동(防築洞)' 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홍정순 여 외2명)
  • 연동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부터 못(淵)이 있어 '못골' 또는 '연동(淵洞)' 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 황매동(黃梅洞)
    옛부터 이 마을에 누런 매화가 많이 있었다 하여 누를 '황(黃)' 자와 '매(梅)' 를 합하여 '황매동(黃梅洞)' 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 (홍무봉 남 외 1명)
  • 어수물(御水물)
    조선시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아들 방원(方遠)의 골육상잔으로 인하여 함흥이궁으로 행하던 중 심화가 치밀고 노기가 등등하여 조갈이 심히 날 때 시종이 맑은 샘물 한 그릇을 진상하였다하여 '진상한 샘물' , '임금님이 잡수신 우물' 이라하여 그 물을 어수물(御水물)이라 하였다고한다.(김택기 남, 이철규 남)

지행동

닥채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종이를 생산하는 부락이라 하여 '종이골' 이라 불리우다가 ' 조골' 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시대는 공동작업반 조직인 '진흥회' 의 명칭을 당시의 구장이 '화성진흥회'라하여 '화성부락(和成부락)' 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종이골'의 종이 '지(紙)' 자와 이웃부락인 '행단(杏亶)' 부락의 은행나무 '행(杏)' 자를 따서 지행리(紙杏里)라 불리우다가 1981년 7월 1일 시승격과 더불어 지행동(紙杏 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심경석 남 외 3명)

  • 무수동(無水洞)
    물이 귀(貴)하여 무수동(無水洞)이라 하였으나 조선시대 중엽 평해 황씨가 매년 물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방축을 만들어 물 근심없는 마을을 만든다고 물 수(水)자 를 근심 수(愁)자로 고치었다고 한다. 방축을 막으면서 단단히 막기 위하여 뚝 위에다 동전을 뿌려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뚝을 밟으며 동전을 주워 가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물을 채워 두면 홍수가 나서 터져나가 일곱 번이나 다시 쌓았으나 매번 터져나가 재산이 다 없어져 끝내 못 막았다 한다. 지금도 논에 수리시설이 없어 천수답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무수동(無水洞) 마을이다. (이채빈 남 외 2명)
  • 행단(杏亶)마을
    이 마을은 144년(세종16) 태어난 어유소(魚有沼) 장군이 1456년 무과급제하기 까지 이곳 에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학문을 익힌 은행나무 밑 단(壇)을 행단(杏亶)이라하여 '행단부락(杏亶部落)' 이 되었고, 사당을 크게 지어 놓고 조상을모시어 사당이 있는 골(谷) 이라하여 '사당골'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박양희 남 외 1명)
  • 산고리
    '산고리' 부락은 한일합방 당시에 이 부락의 돌틈에서 뼈 다친 데 치료제로 사용했다는 좁쌀만하고 네모 반듯한 산고리(일명 생골)가 많이 나왔다고하여 '산고리' 또는 '생골'로 부르게 되었다.

광암동

남쪽에 있는 회암령(檜巖嶺)을 넘으면 회암사(檜巖寺)가 있는데 이 곳에 넓은 바위가 있다 하여 광암동(廣巖洞) 이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보산동

6.25사변 이후 미군부대 주둔으로 인하여 없어진 보안리(保安里)와 축산(축山) 부락의 이름을 따서 보산동(保山洞)이라 하였다.

  • 보안(保安)
    조선시대 후기 이 곳에 논을 만들어 경작하기 위하여 보를 만들어 놓았다하여 이곳을 '보안' 또는 '보뚜뚝' 이라고 불려 내려오고 있다. (홍병인 남)
  • 빈양(賓陽)
    옛부터 솔나무가 많던 곳이로 양지가 들면 경관이 좋아 이 곳을 '빈양'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홍병인 남)
  • 싸리말
    옛부터 이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싸리가 많이 자랐다하여 '싸리울 골짜기' 또는 '축곡촌 (축谷村)' 이라고 불렀으며 남양 홍씨가 대를 이어 살던 곳에 강릉 김씨 10대조가 장가를 들어 이 곳에 들어와 산 후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지면서 '싸리말'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김석경 남)

동두천동

옛날에는 가정리(架亭里)라 불리우다가 한일합방 당시 개칭되었으며, 동쪽에서 흐르는 하천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르고 있어 동두천(東頭川)이라 하다가 동두천(東豆川)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전철수 남 외 명)

  • 원터
    조선 선조 임금때 한양의 중간지점인 까닭에 과거를 보러 갔다 오는 선비와 여행객은 물론 상인들이 하루 쉬고 가는 장소라 해서 '원터' 라 불리어지고 있고, 일설에는 한양거리가 멀다고 해서 '원터' 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김덕순 남 외 명)
  • 창말
    조선시대 때 각종 세곡과 정부미를 저장했던 북창(北倉)이 있었다하여 창리(倉里) 라고 불리어졌으며, '창말'이라고도 불리운다. (경규현 남 외 명)

탑동동

탑동동(塔洞洞)은 원래 포천군(抱川郡) 포천면(抱川面)에 속해 있었으나 1973년 7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두천읍(東豆川邑) 탑동리(塔洞里)로 편입되었다가 1981년 7월 1일 시 승격 과 더불어 탑동동(塔洞洞)이 되었다. 탑동동(塔洞)은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 의 아홉 암자 중의 한 암자가 있었던 자리에 탑과 석불, 탑지가 있어 탑동(塔洞)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석불과 탑지만 남아 있다. (최흥용 남)

  • 쇠 목
    300여년 전 마을 입구에 폭포수가 있었는데 그 폭포수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 소리가 들린 후 부터는 들판에 매어 놓은 소의 목이 잘려 나가 동네 사람들이 숨어서 보았더니 폭포수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나와 소의 목을 잘라 가는 것을 보고부터 '쇠목' 이라 불리어 졌다고 한다.
  • 장 림(長 林)
    동두천 탑동동(塔洞洞)에 위치한 곳으로 동으로는 해룡산(海龍山), 남으로는 칠봉산(七奉 山)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부터 숲이 너무 우거져 앞이 보이지 않아 장림(長林)이라 불리 웠는데, 한자로 긴 숲이라 하여 현재에도 장림(長林) 이라 불리고 있다. (최흥용 남)
  • 좌기골(座起谷)
    이곳은 어유소(魚有沼) 장군이 출생, 성장한 마을로 언젠가 성종 임금이 이곳에 거동하여 잠깐 좌정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후부터 좌기골(座起谷)로 불려오고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성종임금이 좌정하여 어장군의 궁술(弓術)을 시험코자 공중에 날고 있는 솔개미를 쏘게 한 후 솔개미 떨어진 곳까지의 땅을 하사(下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윽고 어장군의 백발백중하는 화살은 창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더니 솔개미를 맞추고 화살을 맞은 솔개미는 허공을 돌다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지금의 동두천(東豆川) 일대가 전부 어장군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정경성 남)

걸산동

이 마을은 지형이 인걸지령(人傑地靈)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의 형세를 따 걸산동(傑山洞) 으로 불리웠는데 본래는 10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돠어 있었으나 현재는 2개의 자연부락만이 남아 있다. (정용학 남)

  • 덕수동(德水洞)
    덕수동(德水洞)은 큰 물이 옛부터 흐름이 큰 덕이 되어 이 마을을 돌보아 주었다고 하여 ' 덕수동'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정용학 남)
  • 탑(塔)
    고려시대 초엽 이 곳에 탑과 석불(石佛)을 모시고 지역 주민들이 불공을 드렸던 곳이라 하여,'탑개울'이라 하며 1899년까지 이곳에 석불과 탑이 있었다고 한다. (정용학 남)
  • 점말(店村)
    고려시대 말엽 이 곳에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점촌을 이루던 마을이라 하여 '점말(店村)'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정용학 남)
  • 능말
    관서 김협(金峽)선생의 묘가 있어 '능말' 이라고도 불리워졌다. (정용학 남)

안흥동

안흥동은 시승격 당시 2개의 리가 합쳐져 구성되었다. 안흥1리와 안흥2리에는 각각 2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안흥부락의 이름을 따서 안흥동(安興洞)이라 하였다. 안흥부락의 안흥 (安興)은 조선조 말기에 있었던 안흥사(安興寺)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말 어느 옹주(翁主)의 묘를 이곳에 안장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안흥사(安興寺)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돌담은 무너지고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있고 옹주의 묘는 평지가 되어 흔적도 없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지고 다만 안흥사(安興寺)가 있었다하여 마을 이름만 안흥동(安興洞) 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용구 남 외 5명, 이철규 남)

  • 내안흥(內安興)
    내안흥(內安興)에는 2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하나는 담안(潭安)으로 송우암(宋尤庵)의 문하생이 담(李 談)이 이곳 흥경암(興敬庵)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후손 이 유(李 兪)가 여기 주위에 넓게 돌담을 쌓고 살았다하여 '담안(談安)' 이라고 불리웠고, 영진(永進)은 약 260년 전에 안흥사(安興寺)가 있어 '내안흥(內安興)'이라 하다가 조선 말기에 사찰이 폐사된 후로 '영진부락'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덕형 남 외 명)
  • 담안(潭安)
    담안(潭安)은 약 200년 전에 전주 이씨가 집 앞에 못을 크게 판 후 주위에 넓게 돌담을 쌓고 살았다하여 담안(潭安)이라고 불리우고 있다.(이덕형 남 외 2명)
  • 외안흥(外安興)
    외안흥(外安興)에는 2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안흥부락의 이름을 따서 안흥리(安興里)라 하였다고 한다. '안흥'은 조선 말기까지 이 마을에 있던 안흥사(安興寺)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말 어느 옹주의 묘를 이 곳에 안장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안흥사(安興寺)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돌담은 무너지고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있고 옹주 의 묘는 평지가 되어 흔적도 없어졌다. 지금은 절도 없어지고 다만 안흥사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만 '안흥동'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외안흥동(外安興洞)이 원래의 위치이다. (정용구 남 외 5명)
  • 도곡(陶谷)
    이 마을은 조선 조 중엽에 토작(土作)을 많이 생산한 마을이라 하여 도곡부락(陶谷部落) 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이남용 남 외 명)

상패동

  • 가마소
    고려 말엽에는 이 마을 입구에 가마솥 모양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어 주민들은 이 연못을 마음의 보물로 여기고 이 연못의 모양을 따라 부락명을 가마소라하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에 이 마을에 대 홍수가 들어 마을의 구조가 조금 변경되었는데 이 때 그 연못이 없어졌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으며, 연못이 없어진 이후에도 이 마을은 '가마소'로 계속 불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은산 남 외 1명)
  • 간촌(間村)
    이 마을은 부락의 북서(北署)에 위치한 미동(彌洞) 마을에 위치한 곡촌(谷村) 사이에 있다고 하여 미동(彌洞)을 포함하여 간촌(間村)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김은산 남 외 2명)
  • 곡촌(谷村)
    곡촌(谷村)은 가마소 고개 아래의 큰 계곡에 위치하였다 하여 곡촌(谷村)으로 불려지고 있다. (김은산 남 외 2명)
  • 남산모루(南山)
    남산모루(南山)는 동두천시 안흥동(安興洞) 뒷산인 마차산(磨叉山)이 남쪽을 막아 앉았다 하여 '남산'인데, 그 산모퉁이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남산모루'라 불려지고 있다. (김은산 남 외 1명)
  • 사천(沙川)
    조선시대 초엽에 이르기 까지 이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물속에 모래가 많이 떠내려와 사천부락(沙川部落)이라고 하였다는데, 이 마을에는 사천현((沙川縣)의 관터(사형장), 옥터 (징역살이), 광의(곡식창고)벌로 불리우는 속지명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김은산 남 외 2명)
  • 선곡(仙谷)
    선곡(仙谷)부락은 착하고 어진 선비가 많이 출생한 곳이라 하여 '선곡'이라 불려지고 있는데, 고려시대 말엽에는 이 부락의 북쪽산을 넘나드는 커다란 고갯길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산을 넘어 다니는 통행인들이 많아 산마루에 통행인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었으므로 부락명을 '성황당(城隍堂)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성황당은 흔적도 없어졌으나 마을 이름은 그대로 선곡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김은산 남 외 2명)
  • 신촌(新村)
    신촌(新村)은 구한 말 양천 허씨(陽川許氏)들이 모여 촌을 형성. 새말이란 말로 통용유래되어 있으며 6.25 동란 이후 부락민들의 이동이 많아지면서 급격히 변화된 부락명을 신촌 (新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김은산 남 외 2명)
  • 인곡(仁谷)
    고려 말엽 이 마을에 어진 선비가 살았다 하여 인곡(仁谷)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며, 일명 인사적골(仁寺蹟골)로도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곳에 절이 있었다 하나 흔적은 없다. (김대섭 남)
  • 정감부락(井甘部落)
    정감부락(井甘部落)은 옛날에는 약수정이 있었는데, 물이 달다 하여 정감이라 하였고, 그 이름을 따서 정감부락(井甘部落)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송내동

송내동(松內洞)은 일명 송라(松蘿)부락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는데, 조선시대 말엽 신천을 경계로하여 현 양주군(楊州郡) 은현면(隱縣面) 용암리에 있는 송천부락의 송(松)자를 따고 동두천시(東豆川市) 송내동(松內洞)에 있었던 옛날 부락명 '라리부락'의 라(羅)자를 따서 송라(松蘿) 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속칭 '서낭당' 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채수연 남 외 4명)

  • 도독골(都督谷)
    도독골(都督谷)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이 95년 고려에 항복을 하자 순왕의 친척들을 보호, 감금하기 위하여 도독골(都督谷)에 도독부(都督村)를 설치하여 호위병을 배치하여 보호케 하고 양주군민으로부터 받은 조세로 생활해 나가도록 위리안치(圍離安置)한 곳이라고 한다. 그 후부터 이 곳을 도독골(都督谷)이라고 전하여 왔으며, 이 골짜기를 대대장골, 중대장골, 소대장골이라고도 전하여 온다. (조규득 남 외 2명)
  • 아차노리
    고려시대 말기(高麗時代 末期)의 무신 주왕(朱王)의 묘자리를 잡기 위하여 당대의 유명한 지사 무학대사(舞學大師)는 천보산맥(天寶山脈)을 따라 지금의 아차동(峨嵯洞)에 내려와 천보산맥(天寶山脈)의 형세로 보아 산맥이 멀리멀리 뻗었을 줄 짐작했는데, 이곳에 당도하니 예측과는 달리 이 곳에서 산맥이 끊어졌음을 보고 '아차'하고 자기의 자리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였음을 느끼고 착오를 자탄(自歎)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후세 사람들이 '아차노리' 라고 불러 왔으며 무학대사(舞學大師)는 결국 그 부근에다 묘지(墓地)를 정하고 말았는데, 그 후 주왕(朱王)의 행자(行者)가 그 곳에 와서 주막을 짓고 있었다하여 그 골짜기는 '행자막골 ' 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점차 변하여 '함지막골' 이 되었다고 한다. (조규득 남 외 2명)
  • 안골부락
    안골부락은 조선시대 중엽에 형성된 마을인데 현 칠봉산(七奉山) 골짜기 안으로 마을이 들어와 있다고하여 안골부락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목태신 남 외 명)
  • 온수골(溫水谷)
    온수골(溫水谷)은 현 천보산(天寶山)과 칠봉산(七奉山) 줄기 끝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안골 부락의 끝을 말하며, 조선시대 중엽 이 곳에서 온수(溫水)가 나왔다하여 온수골(溫水谷)로 불리웠고, 옛날에 약이 제대로 없어 병을 못 고치고 고난을 겪을 때 이 온수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다고 한다.

상.하봉암동

마을 앞 쪽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으며 그 바위산 중에 황새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바위를 황새바위라 불렀으며 부엉이가 자주 날아 들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그 남쪽을 윗사야위, 북쪽을 아랫사야위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 바위가 새바위 즉, 봉암(鳳巖)으로 불리운 데서 마을을 상,하봉암동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정용구 남 외 5명)

  • 동막동(東幕洞)
    이 골은 소요산(逍遙山) 골짜기의 일부로서 마을 전체가 산등성이로 싸여 있어 해가 늦게 뜨며 동쪽이 산으로 막힌 골짜기라는 뜻에서 동막골(東幕谷)이라고 불리었으며, 현재는 동막동(東幕洞)이라고 불리어진다. (최흥균 남 외 명)
  • 황하터
    황하터는 조선시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인 황 희(黃 喜) 정승이 상봉암동(上鳳巖洞)에 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황희대(黃喜代) 라 불리다가 황하터로 변음되어 불리어지고 있다. (이봉구 남 외 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