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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동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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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동명

생연1동

생연1동은 법정동인 생연동을 인구 과다에서 오는 행정 능력의 미급을 막고 시행정의 원만을 기하고자 생연1,2,3,4동으로 분할된 행정동이다. 종래의 자연마을로는 샛골(間村), 방축골(防築洞),못골(淵洞), 황말음리(黃末音里) 등이 있으며 한국전쟁 후 동두천이 발전되는 과정에서 3번 국도 동편에 못골이 새롭게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는 동두천초등학교, 동두천중고등학교, 동두천여중고, 보영여중고 등 교육기관이 집결되어 있으며 동두천시청도 생연1동 관할인 방축동(防築)에 있다.

  • 방축골(防築洞)
    방축골은 그 마을 앞에 방축(저수지)이 있어 방축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도시로 변하여 거의 없어졌다. 성터벌이라 부르던 전답은 이 방축에 저장된 물을 이용하여 경작하였으나 전답이 도시화되고 저수지가 필요치 않게 되어 방축을 메꾸고 시청사를 건축하게 된 것이다.
  • 못골
    동두천시 생연동 못골(池谷)의 유래는 고려 공양왕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홍언수(洪彦修)에게서 비롯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그는 이태조의(李太祖)의 출사(出仕) 권유도 뿌리치고 개성에서 못골로 낙향하여 저택을 새로 짓고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전형적인 멋을 살리기 위해 집앞 정원에 연못을 만들어 운치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부터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600여 년째 못골로 불려 전해지고 있다.
  • 황말음(黃末音)
    이 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평해 황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조선 말까지 내려온 마을로(평해황씨 세보 참고), 황씨가 사는 응달말 이라 하여 황말음리로 불려졌으며 한편 마을에 누런 매화꽃(黃梅花)이 많이 피었다는 연유에서 황매동으로도 불렀었다. 황매화는 죽단화를 이르는 말인데 한때 동두천시화로 지정된 바 있으나 황매화는 식물도감에도 없는 식물로 밝혀져 시화를 장미꽃으로 바꾸어 지정하였다.

생연2~중앙동

1953년 처절하였던 한국전쟁이 소강상태를 지속하고 있을 무렵 난을 피하여 유리(遊離)·방황하며 근근히 생을 유지하던 주민들이 속속 고향을 찾아 수복하였으나 산간오지의 마을을 제외하고 당시 이담면의 중심부인 동두천 장거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삶의 터전을 찾아 구사일생 수복은 하였으나 비바람을 피하고 머리를 디밀어 안식할 곳이란 없었다. 그러므로 연고를 찾아 그나마 남아 있는 집을 찾아 염치를 무릅쓰고 신세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재생의 몸부림은 시작되었다. 흙더미만 남아있는 동두천 장거리에는 입주(入住)가 허락되지 않아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싸리말에도 보따리를 풀고 판자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 쫓겨났다. 그리고 송내리 안골에다 포막을 치고 그날의 삶을 유지하게 되었다. 모든 기관이 그곳에다 터전을 잡고 있었으나 역시 그곳에서 오래 견디기는 불가능하였다.

주민들은 옛 집터에라도 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좀더 넓은 곳을 찾아 지금의 모랫말에다 판자촌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주민들의 욕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더 북쪽으로 좀더 부대 가까이에 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다시 짓다만 판자집을 뜯어 가지고 지금의 신천교(생연2동)사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원주민은 물론 이북 실향민들이 계속 모여들기 시작하여 판자집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미군부대를 근간으로 한 돈벌이는 그런대로 난민들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후 인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그에 따라 점차 도시 형태를 갖추어 갔으며 시가지는 군부대가 있는 쪽으로 늘어나 급기야 구동두천까지 연결되었고 기지촌(基地村)이란 말이 무색하게 소도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룩된 곳이 생연2동과 생연3동, 생연4동이다.
생연1동은 황매, 방축, 연동 등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생연2,3,4동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유래나 전설어린 마을이 없다. 다만 지금의 생연3동 철도 서편에 위치한 어수물(御水洞)이라 하는 작은 마을이 내력을 간직하고 있다.

  • 어수물(御水洞)
    어수물은 현 생연3동 철도 부근에 자리잡고 한국전쟁 직후까지 오랜 세월동안 존속해 온 조그만한 촌이었으나 예전의 모습은 찾아 볼길 없이 도회지로 변해있다. 다만 어수물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어수정(御水井)과 근년에 세워진 조그마한 정자가 옛 이름을 회상하게 할 뿐이다.
    조선 태조가 아들 태종에 대한 분노와 불쾌감을 가슴 가득히 품고 왕좌에서 물러나 함흥 이궁(離宮)으로 향하던 도중 잠시 어가(御駕)를 멈추고 갈증을 풀기 위해 길가 우물에서 냉수를 떠오게 하였다. 시종이 떠다 진상한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난 태조의 울적한 기분은 얼마간 후련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임금님에게 냉수를 진상하게 된 벽촌(僻村) 백성에게는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물을 어수정이라 하였고, 그것이 곳 마을 이름이 되었다 한다. 얼마전까지 현 동두천역을 어수동역이라 하여 귀중한 사적 내력이 간직되는 듯하였으나, 그마저 동두천역이라고 역명이 바뀌어 어수물이라는 말은 점자 사라져 가고 있다.
    (자료 : 동두천시사)

보산동

보산동은 종전의 보산동 전부와 걸산동(傑山洞) 등 2개의 법정동을 병합해서 1개의 행정동이 되었다. 옛날부터 전래하던 마을은 한국전쟁 후 미군의 주군으로 거의 흔적이 없어 졌다. 지금은 새로 형성된 도시 형태의 상가가 점차 확장 발전되고 근접한 미군부대를 주요 거래선으로 하여 동두천시의 전체경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싸릿말(杻山)
    예로부터 이 동리 주위 산과 골짜기에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싸리울' 골짜기라 부르다가 그 산 밑에 강릉김씨(江陵金氏)가 뿌리를 내려 집성촌(集姓村)을 형성, 누대(累代)를 이어 오면서 마을 이름이 '싸리마을(杻山)이 되었다 한다.
  • 보뚝둑이(保安)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이곳에 수리시설(水利施設)인 보(洑)가 있어 보뚜둑이라고 불러왔으며 보안이라 함은 근세에 와서 이를 한자화 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미 2사단 영내이다.
  • 빈양말(濱陽)
    이 마을은 조선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이세근(李世瑾)이 뿌리를 내린 곳으로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온 마을이었다. 동리 앞에는 동두천 맑은 물이 흐르고 동천 하안은 깍아지른 듯한 낭빈양이 있고 주변에는 노송(老松)이 많아 풍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대부들간에 널리 유행하던 매사냥이 늘 이곳에 행해졌으며 양주목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은 동천의 맑은 물과 서남향의 양지바른 것을 뜻해서 빈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걸뫼(傑山)
    걸뫼는 능말(陵末), 덕수동(德水洞)과 함께 일개 법정동을 이루었으나 미군의 주둔으로 민가 마을은 없이 보산동이란 행정동에 편입되었다. 소요산 응봉을 등에 업고 동천물이 옆으로 흘러 산간지대에 형성된 아늑하고 풍치 좋은 곳인 바 사지(寺址)와 탑지(塔址) 등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구전되어온 것으로 미루어 불교문화가 융성하던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축된다.
    마을 전체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는 소요산 남록(南麓)을 가리켜 호걸다운 뫼(山)라하여 '걸뫼(傑山)'리고 이름 붙였다 하며 또한 일설에는 풍수지리설의 산수가 수려하고 소요산의 정기를 받아 인걸이 태어날 수 있는 지형이라는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 능말(陵末)
    능말은 걸산동에서 제일 중심마을이라 여러 집이 모여 있었으나 지금은 미군주둔부대의 영내 중심이 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명필인 한성부윤 김협이 이곳에 뿌리를 내려 그 후손들이 집성한 마을로 김협의 묘를 가리켜 능으로 높혀서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릉이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능말'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음지라하여 '음지 말'이라고도 불려지고 있었다.
  • 덕수동(德水洞)
    덕수동은 소요산 남록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은 산간계곡이어서 그러하였는지 심한 가뭄이 들어 이웃마을은 폐농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 동리 계곡에 흐르는 물은 마르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며 인근 마을까지 물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근마을이 그덕을 보게 되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덕수동이라 하였다.
  • 점말(店末)
    옛날부터 이 곳은 농경시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무쇠솥·보습 등 농기구를 구어 파는 마을이었다. 하여 점말로 불리어 왔고 1945년까지도 이어져 왔으나 지금은 미군이 주둔하여 마을이 없어졌다.
  • 탑개울(塔溪谷)
    구전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이곳에 탑이 세워져 인근 주민들이 불공을 드렸던 곳이라 하여 탑개울로 불리었으며 구한말까지 이곳에 탑과 석불이 있었다고 한다.

송내동

송내동은 일명 송라(松蘿)마을로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강화천(江華川)부근에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강화천을 경계로 남으로 분리된 마을명을 송촌이라 하고 북으로 분리된 마을명을 라리(蘿里, 일명 서낭댕이로 城隍堂의 준말)로 부르게 됨에 따라 두 마을의 이름 중에서 한 자씩을 따서 송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안골(內洞)의 내자와 송나의 송자를 따서 송내동이라고 하였다.

  • 안골(內洞)
    안골말은 강화천변 큰길에서 동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칠봉산(七峰山) 서록(西麓)에 자리잡고 있어 안골로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이 마을은 조선 초기 청주 한씨가 정착하였으며 중종조 말에는 함종 어씨가 뿌리를 내려 4백여 년 째 사천 목씨도 이곳에서 깊숙히 뿌리를 내려 양대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아치노리마을
    고려 말의 무신 주왕(朱王)의 묘자리를 잡기 위하여 당대의 유명한 지산(地士)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천보 산맥을 따라 지금의 아차동(峨嵯洞)까지 왔다. 천보산의 형세로 보아 분명 대지가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던 무학은 산맥이 예서 끊기고 자신의 예측하였던 것과 크게 어긋났음을 알자 자신의 지산(地士)로서의 안목이 부족함을 자책하였다 한다.
    결국 무학대사는 그 부근에 주왕의 묘를 정하였다. 그후 주왕의 행자(行子)가 그곳에 와서 묘막을 짓고 있었다 하여 그 골짜기를 가르켜 '행자막골'이라 하였는데 점차 와전(訛傳)외어 '함지막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이름은 무학대사가 자탄(自歎)하고 '앗차' 한 것을 그대로 불러왔으며 한자로 표기하기를 천보산(天寶山) 봉우리가 높고 험한 것을 뜻하여'아차(峨嵯)'로 하여 음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아차노리가 점점 변하여 아치노리로 되었다.

불현동

1981년 7월1일 시승격과 더불어 종래의 광암동과 포천군 포천면에 속하던 탑동이 동두천시로 편입됨에 따라 기존의 광암동과 탑동 2개의 법정동이 1개의 행정동이 되었으나 98.11.30 조례 제 95호에 의거 내행동과 광암동이 합쳐서 불현동이란 행정동이 되었다. 불현동은 동두천시 남부를 점유하고 있으며 양주군 회천읍, 포천군과 접하고 있다. 시 승격과 더불어 내행동은 송내동과 지행동, 그리고 생연동 일부(生骨)를 병합 송내동의 내자와 지행동의 행자를 따서 내행동이란 행정동이 되었다. 광암동은 동두천시의 남동부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왕방산·해룡산·천보산 등 수려한 명산이 병풍같이 두르고 동두천이 흐르는 정서향으로 지방도로가 내행동 생골을 거쳐 3번 국도에 연결된다. 남향으로 탑동천의 하안을 따라가다 보면 양주군과 통하며 회암사에 이른다.
또한 동쪽으로는 왕방계곡을 따라 도로가 있어 포천군으로 이어지며 왕방리에서 북향으로 우뚝 솟은 국사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따라 난 도로가 포천군 신북면 금동리로 연결된다. 광암동은 미군이 주둔한 관계로 죄기골·내촌·개안·너븐 바위 등의 마을이 없어진지 오래이다.

내행동의 자연마을

  • 지행동(紙杏洞)
    닥채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종이를 생산하였던 관계로 종이골(紙洞)과 사당골(杏壇)의 한자씩을 따서 지행동이 되었다.
  • 종이골(紙洞)
    조골은 종이골로서 예전에 이 마을은 닥채나무를 재배하여 종이를 생산하였으므로 종이골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이를 축약해서 '조골'이 된 것이다. 일제시대 공동작업반 조직인 진흥회의 명칭을 당시 구장이 화성진흥회로 명명한 데서 일제 말기를 전후해서 화성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 사당골(祠堂洞)
    사당골은(일명 杏壇) 어유소(魚有沼) 장군이 출생하고 성장한 마을이며 그가 죽은 후 후손들이 장군의 사당을 짓고 모시며 뿌리를 내려 살아오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전화가 미치자 사당을 장군의 묘소가 있는 좌기골(座起洞)로 옮기었다. 그로 말미암아 사당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사당골'이란 마을 이름이 되었다. 1914년 일제의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행정구역 개편이란 미명 아래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마을 이름을 바꾸어 향단(杏丹)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 무수동(無水洞)
    이 마을은 물이 귀하여 무수동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세거하여 온 평해 황씨 일문에서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농사철만 돌아오면 물이 부족하여 겪어야 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방축을 쌓고 다시 물걱정을 안하는 마을로 만든다고 '수(水)' 자를 '수(愁)' 자로 고쳐 '무수동(無愁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방축을 단단히 쌓기 위해 뚝 위에다 엽전을 뿌려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뚝을 밟으며 돈을 주워가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을 채워두면 홍수가 나서 뚝이 붕괴되고 다시 쌓아 놓으면 터져 나가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마침내 황씨네 재산이 탕진되어 결국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무수동은 수리시설이 없는 마을로 남아있다.
  • 산고리(生骨)
    산고리는 본래 생연동에 속해 있던 자연마을이던 것이 시 승격과 동시에 내행동에 속하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 마을 돌 틈에서 또는 지표 밑에서 산골(生骨)이 나오고 있어 마을 이름이 산고리(산골)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생골이라고 한자화 한 것이다.
  • 좌기골(座起洞)
    예성군(蘂城君) 어유소 장군(1434∼1489)으로 연유하여 성종이 이곳에 거동하여 잠시동안 좌정하였던 사실이 있어 그 후부터 좌기골(座起洞)로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동안 점차 와전(訛傳)되어 '좌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성종이 좌정하고 어장군의 궁술(弓術)을 시험하기 위해 공중에 날고 있는 솔개를 쏘게 한 후 솔개가 맞아 떨어지는 곳까지 땅을 하사(下사賜)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윽고 백발백중의 명궁인 어장군의 화살은 창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솔개를 맞추었고 화살을 맞은 솔개는 허공을 맴돌며 떨어졌다. 이 일화로 지금의 광암, 걸산, 송내, 지행, 보산, 동두천 일대가 전부 어장군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고 한다.
  • 승지골(丞旨谷)
    기촌(일명 턱거리)은 옛 지명이 승지골이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종조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 관찰사와 도승지를 지낸 황서가 태어나 성장한 마을이라 하여 승지골로 전해 오다가 1914년 일제 하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기촌(턱거리)으로 되었다. 기촌은 1945년경부터 터 기(基)의 뜻인 터(地와 同音)와 거리의 터(街地)란 뜻이 합쳐져 턱거리로 불려지더니 한국전쟁 후에 주택과 상가가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욱 턱거리란 지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내촌(內村)
    좌기골(座起洞)과 이웃한 마을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없어진 마을이다. 내반이라고도 불리오던 이 마을은 광주 이씨가 3백여 년을 살아오던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소개(疏開)되어 현재에 이른다.
  • 세목(細目)
    세목은 일명 밤나무골(栗木洞)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명종 때의 양주백정이자 협도(俠盜)로 유명한 임꺽정(林巨正)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양주·포천 고을에 출몰하는 은거지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 입구에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깊은 소(沼)가 있고 그 소위로 백운폭포가 있다. 또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북쪽 언덕위를 절골이라 부르는데 1925년 경 일본인에 의해 불상과 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가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천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왔던 흔적이 남아있다.
  • 외부인통골(外婦人通谷)
    광암동 골말마을은 일명 외부인통골이라 불려져 오고 있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지 이상급(강화도에서 전사)의 배위인 울산 박씨(1602∼1682)가 난리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이래로 외명부 서열에 있던 부인이 이 마을을 관장하였다 해서 외부인통골이라 불러왔다.
  • 조산(造山)
    구전에 의하면 1637년 충의교위(忠의校尉)로 있던 이달준(李達俊, 全州人)이 죽자 묘를 이곳에 썼는데 한 지사(地士)가 말하기를, 묘 앞이 허전하면 후손들이 가난하고 번성하지 못하니 앞에 흙을 돋구어 작은 봉을 만들면 후손들이 번창하고 부를 누린다고 하므로 후손들이 묘 앞에 작은 산을 만들어 놓고 조산(造山)이라 부른 것이 마을 이름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 탑동(塔洞)
    탑동(塔洞)은 원래 포천군 포천면이 속해 있었으나 1973년 7월 1일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시 승격에 따라 광암동에 속하게 되었다. 탑동은 회암사의 아홉 암자 중의 한 암자가 있었던 자리에 탑과 석불이 붙여진 지명이었는데 현재는 석불(石佛)만 남아 있다.
  • 장승거리
    탑동의 낙우(落隅)마을 입구 752번지는 옛날부터 '장승거리'리고 불려져 왔다. 마을 촌로들에 의하면 옛부터 마을 입구가 허(虛)해 마을 주민들이 매년 장승을 세워 치성을 드리면서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이후부터는 장승을 세우지 않아 지금은 지명만 장승거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 넓은 바위
    이 마을은 걸산동과 접하고 광암동의 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미군의 주둔으로 없어졌다. 이 마을에는 크고 넓은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너분 바위(넓은바위)라 불렀으며 넓은 바위가 광암동이란 동명의 원인이 되었다 한다.

소요동

1998.11.30 조례 제9753호에 의거 동안동과 소요동이 합쳐져 소요동이란 행정동이 되었다. 동안동은 과거 이담면의 행정 중심지였던 동두천동과 안흥동 2개의 법정동으로 편성되어 동안동이란 행정동이 되었으며 소요동은 동두천시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상봉암동과 하봉암동 2개의 법정동을 합쳐 소요동이란 행정동이 되었다.

동안동 자연마을

  • 동두내(東頭川)
    동두천은 한국전쟁 전까지 면행정의 중심부로 면사무소는 물론 경찰관서·체신·금융기관과 경원선의 철도가 지나가는 구 동두천역(현재 동안역)의 소재지로서 지역 경제의 주축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가정자리(柯亭子里)리고 불려오던 것이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우리 조상의 숨결이 담겨있는 가정자리를 동두천리로 바꾸었다. 이는 동쪽에 근원을 두고 냇물이 흐르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40여 년 전까지도 일반적으로 '동두내'란 이름으로 불러왔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동두천으로 표기되는데 예전의 '頭"자가 '豆'자로 변한 시기와 내역에 대하여는 1950년대 초기로만 추정한다.
  • 가정자(哥亭子)
    가정자의 유래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도승지(都丞旨)를 지낸 이중경(李重庚, 1680∼1757)이 벼슬에서 물러나 현 동두천동에다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가정자로 한 이후 이곳 일대(현 동두천동 일대)가 가정자리(柯亭子里)로 불려오다가,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고 역명(驛名)을 동두천역(東頭川驛)으로 명명하면서부터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행정명도 동두천리로 개칭되었다.
  • 원터(院址)
    원은 고려와 조선 때 관리들이 출장중에 유숙하는 숙소를 뜻하며 공무(公務)로 출장하는 공무원들의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공용으로 설치했는데, 고려공민왕 때 유지비로 원위전을 주조했으나 정착되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졌다.
    세종 27년(1445)에는 원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원주(院主)로 삼아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주에게 대로(大路)이면 1결 35부(1결은 100부), 중로(中路)이면 90부,소로(小路)이면 45부를 주어 원을 유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원은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국한된 이용자로 인하여 조선후기에는 점차 쇠퇴해 갔다. 동두천 240번지는 연천과 철원 등지로 관통하는 대로와 포천에서 파주로 이어지는 길이 고려시대 이래로 나있던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이 지역은 오랜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원에서 북향으로 1㎞지점에 북창이 있었다. 이 곳에 설치된 이담원은 자좌오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규모를 살펴보면 초석과 기와조각이 산재한 것으로 미루어 백여간은 족히 된 듯하다. 그러나 150여년 전에 원은 폐지되었고, 원터란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는 아파트 군이 들어서 있다.
  • 창말(倉末)
    임진왜란(1592)후 재정사의 곤란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이원익(1547∼1634, 정치가)의 주장에 따라 공납물(公納物)을 쌓아둘 창고를 경기도부터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곳에다 북창(北倉)을 설치하였다. 창고의 크기는 좌기청 4간, 창사 30간 등이었다.
    그후부터 창고가 있는 마을 이라하여 창말(倉末)로 불러 전해지고 있다. 창고가 있던 자리는 한국전쟁 전에는 동두천국민학교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미 2산단 공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 안흥리(安興里)
    안흥리는 밖안흥리(外安興)내안흥(內安興)으로 2㎞ 정도 상거한 2개의 마을로 구별하는데, 밖안흥에는 외안흥과 독터골(陶谷)이 있고 위안흥에는 내안흥과 담안이 있다. 담안 마을에는 큰 릉(陵)이라 불리는 묘가 있는데 이 묘는 고려말 어느 옹주의 무덤이라고 하며 그 묘를 쓰고부터 옹주의 명복을 빌기위해 안흥사(일설에는 興慶庵)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곡담이 다 무너져 흔적까지 찾기 어려우나 널려있는 기와 조각이 위치를 말해준다. 옹주의 묘소 역시 평지가 되었으나 동자석이 홀로 그 자리를 말해준다.
    그런 연유로 이 마을의 지명을 안흥리라 하였는 바, 안흥사가 있던 마을을 내안흥이라 하고 밖안흥은 밤여율(栗灘)옆에 형성된 마을을 말한다.
  • 독터골(陶址)
    독터골은 마차산 동록의 협소한 계곡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 중엽부터 이곳에서 질그릇을 굽는 도요(陶窯)가 있어 질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독터골이라고 부른다.
  • 담안(墻內)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하생 이탐이 이곳에 있던 흥경암(興慶庵)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후손 이유(李瑜)가 낙향하여 주위에다 넓게 돌담(石墻)을 쌓고 살았다는 이유로 마을 이름을 담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있었다는 안흥사(흥경암) 옛터는 깨어진 기와전이 흩어져 있어'절골'로 부르고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고려말 어느 옹주의 무덤이 오랜 세월 풍수에 시달려 평지가 된 채 흔적만 남아있다. 마을명의 원인이 되었다는 돌담 역시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세월의 덧없음을 말해준다.
  • 영진(永進)마을
    영진(永進)은 내안흥의 담안과 윗안흥의 2개 자연마을을 합해서 부른 이름을 바 지명(地名)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과거 면당시 영진이라는 1개 구로 정하고 행정하였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소요동의 자연마을

  • 쇠둔치
    '쇠둔치'는 소요산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경원선과 3번 국도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며 소요산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어 있다. 원래 상봉암동에 속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소요산이 개발되고 관광객이 몰려옴에 따라 점차 인구가 증가 되었다.
    소요(消遙)라는 지명은 신라 때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이산을 개산하고 소요암을 세운 후부터 소요산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산입구에 자리잡은 마을을 '쇠둔치'라 하였다.
  • 사야위(鳳洞)
    '사야위'는 '봉골'로도 불러지며 '아래사야위'와 '윗사야위'의 2개 마을로 되어있다. 마을 앞에 봉황새를 닮은 바위가 있어 이름을 봉바위라 하는데, 그로 인해 봉암이란 이름을 붙여 상봉암동 하봉암동으로 하였다. 지금은 채석으로 인해 훼손되었다. (사야위란 들판을 말한다. 윗사야위는 윗돌, 아랫사야위는 아랫돌을 뜻한다.)
  • 동막골(東幕谷)
    왕방산의 힘찬 지맥이 북으로 뻗어 나가면서 서향으로 소요산을 펼쳐놓고 다시 꿈틀거리며 1㎞를 달리다 동서로 아름다운 계곡을 형성, 그 입구에 옹기종기 20여 호의 마을을 이루어 수백년을 내려온 뿌리깊은 마을이다. 동두천시의 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이 산으로 막혀있어 그 지형에 따라 동막골이라 한다.
  • 용연동(龍淵洞)
    용연동은 동두천시의 최북단 동향 계곡에 위치한 마을로서 계곡 안에 작은 폭포가 있고 그 폭포와 웅덩이를 용못(龍淵)이라 해서 이렇게 불러오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도적의 은거지라해서 도독골로도 불려오고 있다.

상패동

동두천시의 남서부를 차지하는 동이며 고려 현종때까지 포천군의 영현(領縣)이었던 사천현의 형세를 그대로 포용하고 있다. 1패리, 2패리를 상패리라 하던 것을 1965년 1월 1일 상패1,2,3리로 분리하였으며, 1983년 2월15일 양주군 은현면에 속해있던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편입되어 상패동이란 행정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상패, 사천, 정감, 가마소(釜谷), 샛골(間村), 골말(谷末), 남산모루(南山隅),선곡(仙谷), 새말(新村), 인사적골(仁谷)등이 있다.

  • 가마소(釜谷)
    고려 말엽 이 마을 입구에 가마솥 모양의 큰 소가 있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는 적이 없어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소를 귀중히 여겼으며 마을 이름을 소의 모양을 따라 가마소(釜谷)라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에 대홍수로 마을 근처 지형이 크게 달라졌고 귀중히 여겨오던 가마 모양의 소도 없어졌다 한다. 그러나 비록 소가 없어졌어도 마을 이름은 여전히 가마소리고 불러 전해지고 있다.
  • 샛골(間村)
    샛골은 이 마을 북서에 위치한 미동(彌洞) 마을이 근원이 되어 인구가 늘고 남쪽에 있는 골말(谷末)과의 사이에 마을이 형성됨으로 미동을 포함하여 샛골(間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 골말(谷末)
    골말은 가마소 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써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골말(谷夫)이라 부른다.
  • 사천리(沙川里)
    본래는 사천현인데 지금은 사천리라 부른다. 고구려 때에는 내을 매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 사천으로 개칭하여 견성군(현 포천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후 현종 9년(1018)에 양주에 예속되어 조선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 선곡(仙谷)
    선곡마을은 옛날 신선이 사는 동네 또는 어진 선비가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선곡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이 골짜기를 통하여 남북을 잇는 큰길이 있고 산마루에는 통행인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서낭당이 있었으므로 일명 서낭당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 의해 1910년경 서낭당은 없어지고 그 유래만 전해지고 있다.
  • 새말(新村)
    새말은 구한말 양천 허씨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부터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말로 불러졌다.
  • 인골(仁谷)
    고려때 이곳에 어진 선비가 살았다 하여 인곡(仁谷)이라 불러왔으며 인사절골(仁士寺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남산모루(南山隅)
    남산모루마을은 옛 동두천에서 볼 때 남쪽 산모퉁이에 위치한다. 마차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나가다 다시 기봉(起峰)하면서 문필봉을 잉태하는데, 이 산을 남산이라고 부르며 그 산 모퉁이에 마을이 있어 이름을 남산모루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는 한양 조씨가 3백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 정감(井甘)마을
    정감마을에는 옛날부터 동네 중안을 중심으로 동남간에 세곳의 우물이 있어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그 물맛이 하도 좋아 정감 즉, 단우물이라고 부른데서 유래된 것이며 지금도 세 곳에 우물이 있다. 그러나 각종 공해로 두 곳의 우물이 오염되어 폐정(廢井)하였고 한 곳의 우물만 사용하고 있다.